- 출처 : 한겨레 텍스트(출처로 이동)
- 최초 배포 일시 : 2025. 6. 21.
- 최윤아 기자
죄책감의 대물림, 활자로 끊다 ‘수용자 자녀’ 10명의 수기집 ‘기억함의 용기’ 출간 권선징악·가족주의 신봉하는 사회선 자녀도 ‘죄인’ 절친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시절 텍스트로 녹여 |

그날은 여동생의 생일이었다. 스무살 연주(필명)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자식 생일에도 어김없이 이어지던 부모의 다툼 소리를 피하고 싶었다. 꽤 근사한 일식당에 앉았다.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님이 사람을 때렸어요.”
부랴부랴 달려간 경찰서.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사망하셨습니다.” 연주는 아버지가 흉기로 어머니와, 범행을 말리던 친척까지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여동생의 생일은 엄마와 친척의 기일이자, 아버지의 수감일, 연주와 여동생이 ‘수용자의 자녀’가 된 날이 되었다.
“그날을 상자에 넣어두고만 있었는데 사건에 관해 얘기하면서 내가 모르고 있던 감정을 다시 알아가고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 연주는 낮은 목소리로 책을 낸 소회를 밝혔다. 연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수용자 자녀’라는 정체성을 받아 든 청년 10명이 공동 집필한 책 ‘기억함의 용기’(비비투) 출간 기념 북토크 자리였다.

연주는 책에서 그날을 “나침반이 뒤틀린” 날이라고 표현했다. 방향성과 시간성의 완전한 상실. “그때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으로 달려갔더라면 어머니를 한번이라도 더 만나 볼 수 있었을까?” 연주의 시간은 과거를 맴돌았지만 세상의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장례, 상속, 동생 양육까지 연주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줄줄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기댈 수 없었다. (…) 울지 못했다. 내가 우는 순간 억누르고 있는 그 많은 감정이 나를 붙잡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연주는 “나를 짓누른 것도, 일으킨 것도 ‘책임감’이었다”고 썼다. “뭐든 끝까지 해야만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내가 진심으로 보고 느끼고 맛봤다면 나는 이것 또한 치열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부모님이 용돈만 주고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던 철없는 소년은 어느덧 ‘책임감’을 자신의 언어로 재정의할 정도로 깊고 단단해졌다. 그는 여동생 돌보며 물리치료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 책은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의 아이디어로 기획됐다. 세움은 수용자 자녀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국내 유일 비영리 단체다. 2015년 설립돼 올해 만 10년을 맞았다. 2021년부터는 ‘청년 당사자 자문단’을 구성해 수용자 자녀의 이야기를 책(에세이), 웹툰, 미술,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전하고 있다. “글쓰기는 유독 어려워요. ‘언어화’한다는 것은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과정이거든요. 많은 아이들이 처음에 글로 써보라고 하면 ‘기억 안 나요’라고 해요.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깊이 묻어둔 거예요. 일단 생존해야 하니까요. 글을 쓰면서 왜 이 기억을 직면하고, 재해석해야 하는지 스스로 느끼도록 안내해요. 처음엔 팩트만 줄줄이 나열하는데요, 결국 글을 쓰려면 팩트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직면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봉인했던 상자를 스스로 열어요.” 이 사업 담당자인 최윤주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이 프로젝트에 지원한 청년들은 출판사 편집자, 글쓰기 강사로부터 책 쓰기에 대한 기본 사항을 안내받은 다음, 2박 3일 동안의 연수에서 초고 작성, 집단 퇴고를 한 뒤 출간 직전까지 ‘n(엔)차 퇴고’를 거듭했다. “작성자가 초고를 소리 내 읽어요. ‘이 표현의 명확한 의미는 뭐야?’ ‘이때는 어떤 감정이 들었어?’ 동료로부터 조심스러운 질문을 받으면서 그 시절을 더듬어 가요.” 이 과정에서 과호흡이 와 주저앉거나, 몸이 아파 응급실을 다녀온 이도 있다. 실제 이날 북토크에서 ‘작가’ 10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토할 것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과정에 함께했던 이지선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지선아 사랑해’, ‘꽤 괜찮은 해피엔딩’ 지은이)는 북토크에서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면 깊숙한 이야기를 끌어올려서 공유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후략)
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203941.html
죄책감의 대물림, 활자로 끊다
‘수용자 자녀’ 10명의 수기집 ‘기억함의 용기’ 출간
권선징악·가족주의 신봉하는 사회선 자녀도 ‘죄인’
절친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시절 텍스트로 녹여
그날은 여동생의 생일이었다. 스무살 연주(필명)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자식 생일에도 어김없이 이어지던 부모의 다툼 소리를 피하고 싶었다. 꽤 근사한 일식당에 앉았다.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님이 사람을 때렸어요.”
부랴부랴 달려간 경찰서.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사망하셨습니다.” 연주는 아버지가 흉기로 어머니와, 범행을 말리던 친척까지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여동생의 생일은 엄마와 친척의 기일이자, 아버지의 수감일, 연주와 여동생이 ‘수용자의 자녀’가 된 날이 되었다.
“그날을 상자에 넣어두고만 있었는데 사건에 관해 얘기하면서 내가 모르고 있던 감정을 다시 알아가고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 연주는 낮은 목소리로 책을 낸 소회를 밝혔다. 연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수용자 자녀’라는 정체성을 받아 든 청년 10명이 공동 집필한 책 ‘기억함의 용기’(비비투) 출간 기념 북토크 자리였다.
연주는 책에서 그날을 “나침반이 뒤틀린” 날이라고 표현했다. 방향성과 시간성의 완전한 상실. “그때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으로 달려갔더라면 어머니를 한번이라도 더 만나 볼 수 있었을까?” 연주의 시간은 과거를 맴돌았지만 세상의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장례, 상속, 동생 양육까지 연주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줄줄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기댈 수 없었다. (…) 울지 못했다. 내가 우는 순간 억누르고 있는 그 많은 감정이 나를 붙잡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연주는 “나를 짓누른 것도, 일으킨 것도 ‘책임감’이었다”고 썼다. “뭐든 끝까지 해야만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내가 진심으로 보고 느끼고 맛봤다면 나는 이것 또한 치열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부모님이 용돈만 주고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던 철없는 소년은 어느덧 ‘책임감’을 자신의 언어로 재정의할 정도로 깊고 단단해졌다. 그는 여동생 돌보며 물리치료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 책은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의 아이디어로 기획됐다. 세움은 수용자 자녀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국내 유일 비영리 단체다. 2015년 설립돼 올해 만 10년을 맞았다. 2021년부터는 ‘청년 당사자 자문단’을 구성해 수용자 자녀의 이야기를 책(에세이), 웹툰, 미술,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전하고 있다. “글쓰기는 유독 어려워요. ‘언어화’한다는 것은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과정이거든요. 많은 아이들이 처음에 글로 써보라고 하면 ‘기억 안 나요’라고 해요.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깊이 묻어둔 거예요. 일단 생존해야 하니까요. 글을 쓰면서 왜 이 기억을 직면하고, 재해석해야 하는지 스스로 느끼도록 안내해요. 처음엔 팩트만 줄줄이 나열하는데요, 결국 글을 쓰려면 팩트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직면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봉인했던 상자를 스스로 열어요.” 이 사업 담당자인 최윤주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이 프로젝트에 지원한 청년들은 출판사 편집자, 글쓰기 강사로부터 책 쓰기에 대한 기본 사항을 안내받은 다음, 2박 3일 동안의 연수에서 초고 작성, 집단 퇴고를 한 뒤 출간 직전까지 ‘n(엔)차 퇴고’를 거듭했다. “작성자가 초고를 소리 내 읽어요. ‘이 표현의 명확한 의미는 뭐야?’ ‘이때는 어떤 감정이 들었어?’ 동료로부터 조심스러운 질문을 받으면서 그 시절을 더듬어 가요.” 이 과정에서 과호흡이 와 주저앉거나, 몸이 아파 응급실을 다녀온 이도 있다. 실제 이날 북토크에서 ‘작가’ 10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토할 것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과정에 함께했던 이지선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지선아 사랑해’, ‘꽤 괜찮은 해피엔딩’ 지은이)는 북토크에서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면 깊숙한 이야기를 끌어올려서 공유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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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203941.html